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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음악도서관에 다녀와서 / 음악을 수집한다는 것

소심한 늑대개 2023. 3. 30. 15:57

나는 학부 시절 건축공학과 조경설계를 공부한 짧고 얄팍한 나름의 역사가 있어 보통 사람들보다는 건축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다. 당시 내가 관심가졌던 것은 늘 정원 딸린 멋진 저택보다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공공장소였다. 필지 주인의 취향과 의도가 들어간 공간의 창작도 물론 멋진 일이지만, 도시 속에서 그 장소의 의미와 역할을 찾는 공공 건축은 그 자체로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늘 청계천, 서서울호수공원, 선유도 공원,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을 배회하고 다녔었다. 이곳을 설계한 사람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식의 생각을 하면서. 

몇 년후 공대 대학원생이 된 나는 소싯적의 낭만을 마음속 깊이 눌러두고 연구실과 실험실 주변을 배회하게 되었는데... 어느날 이태원 한복판에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라는 곳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음반 매장'이라는 골목 상인들의 영역을 침범한 거대 기업의 횡포라는 비판적인 기사들도 함께 말이다. 일년일년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서울의 골목 풍경이 아쉬웠던 나는 '응 그렇지. 대기업이 이런 것까지 하면 좀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얼마 간은 뮤직 라이브러리를 찾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한남동  언덕을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이태원 풍경을 그림처럼 걸어둔 커다란 문'은 늘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 나는 급기야 현대카드를 하나 만들어(당시 나는 체크카드 밖에 없었다) 그곳에 입장하게 되었다. 소감이 어땠냐구? 완전 놀이동산이 따로 없었다. 찰리의 초콜렛 공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려나. 그곳은 그냥 거대 기업의 음반 매장이 아니었다. 아 물론, 카드사 입장에서는 좋은 홍보 수단이 되어 음반으로 돈도 벌고 신규 고객을 많이 유인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던 대학원생이 카드를 만든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렇다하더라도 2층, 3층에 빼곡하게 꽂혀있던 전세계의 음반들과 희귀서적들은 음악을 즐기는 색다른 방법/경험을 선사하는 곳이었다. 책이 꽂혀있는 도서관이야 많이 가보았지만 음반이, 그것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음반이 이렇게나 많은 곳은 내 생애 처음이었기에 내 눈은 엄청나게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난다.  그날 몇시간 동안 음악을 듣고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후로도 트래블 라이브러리나 디자인 라이브러리 같은 곳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갔었다. 마침내 나는 이곳은 골목 상인들은 도저히 조성할 수 없는 문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더랬다. 심지어 대기업이 이런 공간을 선보여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카드사 고객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 입장 자격이 크게 까다롭지 않으니 말이다. 

한편 입장 자격이 크게 까다롭지 않음에도 '현대카드가 있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는 조건은 은근히 많은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시킨 요인이 되기도 한 것 같았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현대 카드가 없어서, 혹은 몰라서, 그곳을 안 가봤다고 하는 것이다. 오디션 프로와 힙합으로 도배되고 있는 매스미디어의 음악방송은 대중들로 하여금 다양한 방법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점과 세상엔 다양한 음악이 많다는 점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기에.. 뮤직 라이브러리를 가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꼭 그 곳을 가볼 것을 추천했었다. 이 곳이 기업이 지은 공간이라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래서일까? 의정부에 음악과 미술을 테마로 한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기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갤러리 같은 공간이 아니라 공공도서관으로 지어졌다는 점이 더욱 고무적이었다. 근처에 갈 일이 생겨 벼르고 벼른 음악 도서관 방문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의정부 음악 도서관에 대한 첫 인상을 떠올려보면.. 공공도서관의 특성상 아주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기에 '이곳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만 방문해 오히려 좋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처에 어디를 가느라 들른다든지 잠깐 수다떠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음악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즐기러 오는 사람드만 오는 곳.  그리고 여기엔 음악을 사랑하는 큐레이터들이 세상의 모든 음악들을 (맛보기 수준이라 할지라도) 소개하기 위해 정성들여 모아둔 컨텐츠가 있었다.  놀라운 건, 도서 뿐만 아니라 음반 대여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자가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에서 듣는 음악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고려했기에 대여 서비스를 감행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에 대해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1층은 마치 도서관과 같은 느낌
LP을 들을 수 있는 공간. 수집된 LP의 양이 아주 방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클래식, 재즈, 팝, 힙합 등 컬렉션이 은근 다채롭다
2층에서 내려다 본 공간
입구 한켠에 있던 재즈 잡지 코너. 내가 글을 쓴 호도 있나 찾아봤지만 2022년 책은 아직인것 같았다.
CD도 많다. 월드뮤직 코너에서 골라낸 보사노바와 아프로 쿠반 재즈 음반.

 

최근 들어 많은 이들이 음반 구매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 고음질 스트리밍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는 만큼 물리 음반의 영역에서는 다시금 아날로그 소리가 각광을 받고 있다. 디지털 파일이 따라갈 수 없는 LP특유의 감성이랄까... 어떤 이들은 리셀 시장에서의 차익 실현을 꿈꾸면서 희귀한 바이닐을 모으기도 한다. 이런 트렌드 때문인가 혹자는 나에게 더이상 CD를 구입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당장 CD구매를 그만두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곳에 가보고 나니 역시나 '아, 내가 이래서 음반을 구매하고 있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 음반을 구매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아카이빙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전시된 공간을 꾸리는 것. 예전 글에 썼던 내가 음반을 구입하는 이유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