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에서는 - '새로운 물결 Bossa Nova의 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역사상 첫번째 보사노바 앨범의 등장과 사람들이 어떻게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두 번의 첫번째 보사노바 앨범
보사노바라는 명칭을 부여한 Lyra, Menescal, Bôscoli, Leão 등의 모임은 1958 년 브라질 가수 엘리제테 카르도소Elizete Cardoso의 새 앨범 'Canção do Amor Demais'이 발표되었을 때 시작됐다. 카르도소의 1958년 앨범은 역사적으로 “첫번째 보사노바 앨범”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브라질판 롤링스톤에서 브라질 음악사의 100대 주요 앨범 중 하나로 꼽은 앨범이이기도 하다.
앨범은 발매 당시 그다지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는데, 주로 클래식 음악과 시를 전문으로하는 소규모 독립 음반사인 Festa 레이블에서 제작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앨범은 비니시우스의 시에 음악이 붙여진, 굉장히 특별한 앨범이었다. (비니시우스의 시집 발매는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음악이 붙은 것이 처음이라는 뜻) 그리고 음악을 붙인 사람은 당시 작곡 파트너십을 맺었던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었다. 모라이스와 조빔의 13개 곡을, 당시 유명한 삼바 가수였던 Cardoso가 녹음한 것이다. 이 앨범에는 'Chega de Saudade (No More Blues)'와 'Outra Vez'라는 제목의 트랙이 등장하는데, 이 두 트랙의 기타를 바로 주앙 질베르토가 연주했다.
이 앨범은 1958 년 5 월에 녹음되었고 6월에 발매되었는데.. 그러고보니 소규모 레이브에서 발매한 것 말고도 이 앨범이 흥행에 필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당시 리우뿐만 아니라 브라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월드컵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 축구 팀이 스웨덴 월드컵 우승을 해버린 것. 17 세의 펠레가 인저리 타임에서 헤딩으로 홈팀 스웨덴을 5-2로 승리했으니 당시 브라질의 축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국내외 축구 열기가 좀 식었을 때, 한 달 후인 1958 년 7 월, João Gilberto의 자체 버전 Chega de Saudade(78rpm, 싱글)를 출시하였다. 이것이 조빔, 모라이스, 질베르토가 함께 발매한 첫번째 앨범이다. 사실상 보사노바를 알린 진짜 첫번째 앨범은 이 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앙 질베르토의 'Chega de Saudade'는 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으로 발매 즉시 브라질 모던 음악의 대표가 되었다. 질베르토의 음성이 브라질 전역의 전파를 타고 나가자 브라질 젊은이들은 레코드를 찾기 위해 가장 가까운 뮤직 스토어로 달려갔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기타를 사서 Gilberto처럼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Chega de Saudade 앨범 커버의 João Gilberto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같은 풍부한 감정처럼, 보사 노바의 앨범커버 아트는 바로 그 음악만큼이나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대중들에게는 그야말로 새롭고 세련된 '힙한' 음악이었을 것이다.
브라질의 희망 시대, 보사노바의 확장
Gilberto의 첫 번째 앨범 이후 보사노바 무브먼트는 브라질에서 빠르게 추진력을 얻었다. 첫 보사노바 라이브 쇼는 호날두 보스콜리가 실비아 텔레스, 나라 레앙과 함께 열었다. 로베르토 메네스칼, 치코 페이토사, 루이스 에사, 루이스 카를로스 민하 등도 이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주앙 질베르토의 첫번째 앨범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Odeon의 대표 André Midani는 기쁘게 위 아티스트들과의 녹음을 계약한다.
이어서 1959 년 비니시우스의 연극 "Orfeu da Conceição"를 각색한 영화 'Orfeu Negro'(Black Orpheus)가 개봉한다. 프랑스 영화 감독 Marcel Camus가 연출하고, 조빔, 비니시우스 및 기타리스트 루이스 본파 Luiz Bonfá가 영화음악을 만들었다. 흑인 오르페Orfeu Negro는 1959 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1960 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1960 년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영화상, 1961년 Bafta 최고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성과를 냈고 전세계에 브라질 음악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리오의 삼바스쿨, 컬트 종교인 Candomblé의 특성 및 기타 아프리카-브라질 스타일의 음악을 조화롭게 담아낸 Orfeu Negro의 음악은 보사 노바의 미래, 그 확장성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전성기를 맞았다.
루이스 본파가 연주하고 카르도소가 노래한 Manha de Carnaval
브라질 역사상 1956-60년의 시기는 경제 번영, 정치적 안정, 그리고 제1세계로의 진출이라는 낙관주의의 희망이 피어오르던 시기였다. 새로운 도시 중산층은 언덕의 오래된 삼바가 브라질의 새로운 비전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꼈고, 보사노바의 새롭고 현대적인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보사노바는 경제적, 정치적 색깔은 거의 담지 않았으며 주로 사랑, 자연, 그리움을 노래했다.
그들은 또한 영리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정의/전개해나갔다. 작사가 뉴턴 멘돈사Newton Mendonça는 조빔과 함께 'Desafinado'(영어로 해석하면 플랫,Off-key)를 썼는데, 이 곡은 조빔의 음악이 어떻게 약간 음정이 맞지 않는지, 음악 구조 또한 어떻게 전통적인 규칙을 어기는지를 논의하는 곡이다. 큰 목청과 화려한 바이브레이션을 자랑하는 가수들이 많았던 당시에는 조빔이 노래를 너무 못 한다는 평가가 다수 존재했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당신은 내가 정말 노래를 못 한다고 하죠, 내사랑.
당신은 알아야 해요, 그게 나에게 큰 아픔을 만든다는 걸.
(중략)
이렇게 하는 게 보사노바에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
당신이 모르는 게 있죠, 그리고 당신이 상상하지 못 하는 것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에도 진심은 있는 거에요
...
이 동영상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앙 질베르토. 조빔 또한 이 노래를 즐겨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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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없던, 기시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음악의 한 장르가 이렇게 소수의 음악가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시작점 들을 정리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고도 놀랍다.
음악사의 위인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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