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브라질의 현대 음악사를 연재하는 시리즈의 첫편. 여차여차하다보니 - 그 시작은 삼바가 브라질의 대표 음악이자 공연 문화로서 자리 잡게 된 배경인 1930년대 바르가스 대통령 집권에 대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르가스 대통령의 집권
브라질은 -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듯 왕정체제를 거쳐 - 민주적인 정치체제로서 1899년 최초의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제1공화정은 전통적 과두지배자에 의해 좌우되었고, 사회 구조의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외계층의 반란과 농촌 및 도시지역 노동자들의 빈번한 파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나마 호황을 누리던 커피산업마저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어려워지자 브라질은 불황에 늪에 빠지게 되었다. 시민들은 사회 전반의 변화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필요로 했고, 1930년 혁명/쿠데타를 통해 바르가스(Getúlio Vargas)가 집권했다.
바르가스는 집권 후 얼마간은 민주주의의 틀은 지키면서 자신의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시키는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1937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일명 신체제(Estado Novo)라고 불리는 전체주의적 헌법을 발표하고 어떤 종류의 반대도 용납하지 않는 억압적이고 검열적인 정권을 운영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 헌법을 발표한 것을 떠올릴 수 있겠다.
바르가스의 독재는 1945년까지 지속되었고, 1951~1954년 선출된 권력으로 대통령 자리를 이어간다. 브라질은 거의 18년간 바르가스의 독재 하에 있었으며, 그는 국가 전반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가스와 브라질의 새로운 민족성, 삼바
바르가스는 독재자였지만, '자비로운 빈민의 아버지'로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던 모양이다. 그는 농지 개혁, 노동권 개선, 여성의 권리, 아프리카 계 브라질인의 권리를 약속하는 등 브라질의 현대화를 준비했다. 물론, 바르가스의 약속은 충분히 이행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가스는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povo)들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는 방식으로 국가를 통일하는 데 성과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miscegenation"이라는 컨셉을 장려하며 브라질의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프리카계 브라질인과 브라질인이 '철학적으로는' 같으며 함께 잘 살아보자는 인식을 심어줬다. 브라질을 포르투갈인, 아프리카 및 원주민 인디언 등의 인종이 혼합된 국가로서 새로운 정의(컨셉)를 장려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이후에도 흑인을 탄압하는 Jim Crow 법률들이 존재했음을 떠올려보면 이는 노예 제도가 존재했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 할 수 있다.
바르가스는 민족주의 추진의 일환으로 아프리카-브라질 문화와 음악이 국가을 통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장려했는데, 이것이 삼바가 20세기 브라질 최초의 민족 음악이 된 배경이 되었다.
바르가스와 삼바의 명성, 그리고 삼바의 오염
1930년대 바르가스 대통령은 '문화적 민족주의'를 채택하였는데, 음악적으로는 삼바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성장시켰을뿐만 아니라, 축구를 브라질의 국기로 자리잡게 한 것도 이 시기이다.
사실 이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게, 바르가스 대통령 본인이 만들고 완성시킨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Samba de Morro (언덕에서 온 삼바)'라는 자국의 새로운 문화적, 음악적 정체성을 제안하고 아프리카계 브라질인들도 대표할 수 있는, '혼합된(Mestizo)' 브라질의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던 중이었다. 브라질의 국민 작가 조르지 아마두(Jorge Amado)와 마리우 데 안드라데(Mário de Andrade)와 같은 작가들이 이런 흐름에 힘을 실었던 작가들이다. 바르가스는 여기에 숟가락을 얹어 아프리카계 브라질 문화가 브라질의 국가적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지지의 표현, 삼바학교에 대한 지원과 카니발의 활성화, 금지되었던 카포에라 무술의 합법화 등으로 새로운 민족주의적 문화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삼바라는 음악은 브라질인들을 하나로 모으고, 대외적으로도 브라질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가되었다.
한편, 1930년대 말 바르가스의 파시스트적 전체주의, 억압과 검열의 독재정치에 의해 삼바는 오염되기 시작한다. 국가적 자부심과 바르가스의 통치를 찬양하는 'samba-exaltação'를 장려하고, 삼바의 보다 전통적인 모습에 가까운 비순응적이고 거리의 모습을 담는 노래들은 배제되기 시작했다. Ary Barroso가 작곡하고 1939년 Francisco Alves가 녹음 한 Samba-exaltação 'Aquarela do Brasil'이 해외에서 성공한 최초의 삼바가 되었다. 아래 영상은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아쿠아렐라 두 브라질. 작업 자체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상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 브라질 내부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임을 떠올린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50년대에는 Carmen Miranda가 헐리우드에서 이러한 (짝퉁) 삼바를 홍보하면서, 브라질문화는 마치 커다란 과일바구니의 머리장식을 한 옷차림으로 묘사되는 둥 왜곡되어 전달되기 시작한다. 삼바의 명성이 훼손된 것이다.
아, 여담이지만 카르멘 미란다가 의도적으로 짝퉁 삼바를 홍보했다는 식으로 전달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그녀가 원했다기보다는 시대가 그녀에게 허락한 기회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쩌면 상당한 비운의 인물이라 보는 것이 타당한데... 카르멘 미란다에 대해 잘 몰랐던 내용이 소개된 글이 있어 링크를 남겨둔다.
링크 : 우리가 몰랐던 카르멘 미란다 https://brunch.co.kr/@brazilclub/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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