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1960년대 브라질 음악사

2. 모더니즘 그리고 브라질리아

소심한 늑대개 2021. 10. 18. 12:05

이번 편에서는 브라질에 찾아온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무려 모더니즘이라니, 너무나 큰 담론이지만 보사노바를 얘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다. 왜 인지에 대해서는 말미에 짧게 얘기해보겠다.


 

브라질 모더니즘의 분수령 : 현대미술주간

 

브라질의 모더니즘의 시작은 1922년 상파울루에서 열린 'Semana de Arte Moderna'(현대 미술 주간)라 보는 시각이 다수이다. 이 전시회는 시인 마리우 드 안드라지(Mário de Andrade)와 시인 오스왈드 드 안드라지(Oswald de Andrade), 화가 에밀리아노 디 카발카티(Emiliano Di Cavalcanti)와 아니타 말파티(Anita Malfatti), 작곡가 에리토 빌라로보스(Heitor Villas-Lobos)를 포함한 친구들이 주최한 전시회로, 최첨단 유럽 모더니즘과 브라질의 감성을 혼합 한 예술, 음악 및 조각을 선보였다.

이 전시회가 중요했던 것은, 유럽의 사상과 문학, 예술을 그대로 복사하여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국인 브라질을 알고자 하는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중산층의 정치적 욕망과 밀착/발전된 작품들이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우와 오스왈드는 식민지 종주국으로부터 정치적, 예술적 탈피를 주장하고 '브라질의 재발견'을 주도하였다.

특히 오스왈드는, 브라질 예술가들이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먹고 뱉어내는' '문화적 식인 풍습'으로 정의했다. '뱉어내는'이나 '식인풍습' 등의 단어가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국의 문화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주의 족쇄와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이 전시회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1922년을 기점으로, 브라질 현대시에서는 과거의 전원주의와 상징주의에서 나타난 간접어법이 아닌 직설적 표현이 강해졌고 상류 계층이 사용하는 아카데믹한 언어가 아니라 일반 국민이 쓰는 일상어가 주된 시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일상어로 사회상을 비판하는 해학시가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또한 산문시와 같은 자유시를 선호하는 등 기존의 율격을 파괴하며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문학을 선호하게 되었다. 모더니즘 사조를 "현대시" 중심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 현대미술주간을 주도했던 마리우 드 안드라지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우는 브라질의 토착 민속 음악을 무수한 형태로 연구하고 기록한 인류 학자이자, 음악가, 작가이기도 했다. 브라질의 모더니즘에 대한 안드라지와 동료들의 연구는, 과거의 토착 민속음악에 대한 분석과 얽혀 있었다. 몇 년 후에 일어난 bossa nova와 tropicalia 음악 운동은 최초의 모더니스트로서 이를 기준점으로 언급한다.

실제로, 시인이자 외교관이며 보사 노바의 창시자인 비니시우스 데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 1913년 출생)는 브라질 모더니즘의 구상자들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비니시우스는 현대주의 기법을 사용한 시적인 작사 스타일에 브라질의 구어체를 혼합하여 대중 음악에 참여했다. 후에, 주앙 질베르토(João Gilberto)와 까에타노 벨로주(Caetano Veloso)는 현대시인 Carlos Drummond de Andrade를 각각 bossa nova와 tropicalia의 탄생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이라 말했다고 한다.

쿠비체크의 집권, 신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설


한편, 1945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 직에서 내려왔던 바르가스 대통령은 1951년 민주적 선출을 통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브라질 노동당(PTB)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노동계의 지지를 얻었던 바르가스는 전체주의 국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명 '빈민의 아버지' 바르가스는 최저임금 100% 인상을 추진하다가 보수파와 갈등을 겪고, 군부로부터 사임을 요구받게 된다. 그는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확신하고, 1954 년 8 월 24 일 사임을 발표한 뒤 몇 시간 만에 가슴에 총을 쏴 자살했다.

사족으로.. 바르가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라고 한다. 브라질의 산업화를 선도하고 노동자의 권리 보장, 의무교육 도입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없내는 등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임기 전반에 걸쳐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2기 집권시에는 민주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공업화를 추진했음에도 경제를 말아먹었다는 점 등으로 비판도 받고 있다.

1956 년 1 월 31 일, 주셀리누 쿠비체크Juscelino Kubitschek 가 '50년의 진보를 5년에'라는 슬로건과 함께, 새로운 비전과 발전주의 프로그램을 내세워 권력을 잡았다. 그는 대규모 대외 원조를 통해 국가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급속한 산업화에 착수하여 자동차 산업을 도입/육성하였으며 국가의 광대한 내륙 지역을 여행 할 수있는 초국가 도로 단지를 개발했다. 쿠비체크의 재임기간 5년동안 자동차 제조량은 연간 300,000 대가 넘었고 경제는 연간 8 %의 속도로 성장했다. 그는 현대화의 아버지로서 브라질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쿠비체크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새로운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설한 것이다. 지역 균형 발전을 목적으로, 양대도시가 있는 해안지역과 떨어진 불모의 내륙지역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정말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브라질리아는 “과거가 없는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세계적인 도시계획가인 루시오 코시타 Lucio Costa와 브라질의 급진적인 모더니스트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 도시는 비행기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며, 조정석 위치에는 국회의사당, 대통령청사, 대법원 등이 들어섰다.비행기 몸체에는 정부청사들이 들어섰으며, 날개는 주거지역, 상점가 및 문교시설을 두도록 계획되었다. 주거지역의 경우, 가로280m, 세로 280m의 슈퍼블록(모듈)의 배치가 제안되었는데, 근로자, 고위공무원 등이 계급없이 어우러져 살기 바랬던 루시오 코스타와 오스카 니마이어의 사회주의적 이상향이 반영된 곳이었다.

루시오 코스타가 그린 도시설계도 (1957), Wikipedia
비행기모양으로 조성된 브라질리아, Wikipedia

 

브라질리아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성지로 불린다. 특히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공공건물들은 매우 혁신적이고 '모던'하다.

 

브라질리아 대성당, Getty Images/Flickr RM
브라질 대법원,  Getty Images/Flickr RM

아래 링크에 가면 오스카 니마이어의 더 많은 멋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링크 : https://www.architecturaldigest.com/gallery/stunning-modern-architecture-oscar-niemeyer



바르가스와 쿠비체크는 모더니티를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가스는 근대성(모더니티)을 민족주의를 돕는 도구로 보았으나, 쿠비체크는 “근대성을 통한 진보”라는 비전을 브라질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주입했다. 이것이 브라질이 제3세계를 떠나 제1세계로 진입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말이다.

 

브라질 근대성의 진원지, 리우와 보사노바


자, 그래서 앞서 본 내용들과 브라질 음악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하면,
바로 이런 모더니즘이 꽃피우던 시기에 보사노바가 생겨났음에 주목해보려 한다.

독재정치가 막을 내리고 브라질리아가 건설되던 격동의 1950 년대 후반, 리우데자네이루는 브라질 근대성의 진원지였다. 이 시절 젊고 부유한 중산층 도시 거주자 'Cariocas'(리오 거주자를 칭하는 단어)는,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면서 삶을 즐겼던 세대로 그들의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젊은이들이 기타를 연주했지만 카니발에서 춤을 추거나 정부를 찬양하거나 삼바를 부르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보사노바는 단 하나의 악기(기타로 대표되는)로 삼바 비트 위에 복잡한 화성과 포스트밥 음색을 겹쳐낸 음악적 풍경을 그린다. 깔끔한 멜로디, 기묘한 리듬과 세련된 가사들은 그 당시 삼바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음악이었다. 또한 속삭이는 듯한 João Gilberto의 목소리는, 거리의 음악이었던 삼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보컬이었다. 연극적 표현이나 비브라토없는 이 담백한 보컬은 도시적인 리우의 아파트나 작은 소규모 클럽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형태인 보컬 타일이었던 것이다.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새로운 모더니스트 도시 라이프 스타일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부상한다. Rio의 'Zona Sul (남쪽 구역)'의 작은 소우주 세계에서 생겨난 이 낙관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은, 브라질을 거쳐 미국과 나머지 세계로 퍼지며 브라질의 가장 큰 음악 수출품이 되었다.

※ 참고: 브라질 현대시에 관한 고찰(이승덕, 1996) / 20세기 브라질 시문학의 탈식민적 전위선 연구(박원복,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