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1960년대 브라질 음악사

[에필로그] 보사노바는 중단되고 간직되었기에 더욱 아름답다

소심한 늑대개 2021. 12. 23. 20:07

Gilles Peterson의 책을 읽고 쓴, 보사노바의 등장과 부상 그리고 MPB의 등장을 다룬 8편의 연재가 끝이 났다.  거의 6개월이 걸린 프로젝트였다. 처음 시작할 때엔 이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 했다. 그저 영어로 된 원문을 한글로 번역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역사, 정치, 사회문화에 무지했던 나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과 기사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 이윽고 브라질 음악에 참 다양한 이야기가 얽혀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따금씩은 새로운 앎과 소개에 대한 즐거움보다도, 내가 오역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브라질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순간부터 이 책을 번역하는 데에 괜한 사명감을 느끼고 작업을 했던 것 같다. 나도 이제서야 첫 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면서 말이다. 책 속의 컨텐츠를 단순 번역하는 것을 넘어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정보를 정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리즈를 연재하려고 마음 먹었던 동기는, 한국에서 보사노바를 소개하는 많은 글들이 사용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다가와 좀 다른 설명을 남겨보자는 데에 있었다. 보사노바는 주로 이런 식으로 설명되곤 한다 :  "1960년대 초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나타나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60년 후반에 쇠퇴한 하나의 음악 사조", "브라질의 백인 중산층 중심으로 들었던 음악". 대중음악사를 이해하기 쉽게 압축정리해서 요점만 남기다 보니 생긴 현상이었겠지만, 보사노바에 켜켜이 쌓여있는 풍부한 정서와 이야기를 너무나 매끈하게* 정리해버리고 있었다. 쿨 재즈의 브라질 버전이라거나 재즈의 하위 장르라고 일컫는 잘못된 설명들도 간혹 있었다. 또, 이런 분위기도 못 견디게 싫었다 : 보사노바를 '라운지 음악,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등 듣기 편한 음악 장르 중 하나로 정의해버리는 것.  

*매끈 : 생각의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너무 단순화하고 간략화하는 바람에 오히려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해버린 상태를 표현하고자 선택한 단어다. 

물론 예술에 지나치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고, 사회문화적 배경을 모두 배제하고 온전히 그 작품만을 즐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술 감상의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흐름이나 사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사회적 배경을 논외로 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음악사적 변곡점에 관심을 두어 보사노바를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 등장과 종말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다. 


8편의 연재를 간추려보자면 이렇다. 

  • (1편, 2편) 보사노바란, 1960년대 브라질에 경제성장의 희망과 낙관주의 분위기가 흐르던 시절, 새로운 생활양식을 대표하는리우데자네이루의 음악적 무브먼트다.
  • (3편, 4편, 6편) 거리의 비순응적 음악이었던 삼바가 아니라, 도시의 소규모 클럽에서 즐기는 음악으로서 보사노바 특유의 양식(비트, 화성, 가사)이 생겨났고, 이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다.
  • (5편, 7편) 브라질의 정치-사회가 기대했던 것만큼 나아가지 못 하자, 예술가들은 더이상 새시대의 희망을 대표하는 보사노바를 부를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음악적 양식을 찾아 나선다. 
  • (8편) 어느덧 브라질 대중음악은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의 음악으로서 브라질 대중음악(MPB)의 흐름을 이어간다. 

내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60년대 후반 보사노바가 더이상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뮤지션들이 직접 보사노바를 부르지 않는 쪽을 택했다는 점이다. 보사노바의 부상을 주도했던 뮤지션들은, 군부독재와 억압이 시작되자 낭만과 희망이 담긴 보사노바 부르기를 거부하고 암울한 시대상에 대한 고발을 노래했다. 

나는 이들이 일종의 저항운동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보사노바가 1960년대 후반 종말했다는 것은 그 음악의 힘이 쇠퇴하거나 빛이 바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초기의 낙관주의적 분위기에서 탄생한 보사노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박제하고 뒤이어 등장한 MPB의 가치에 더 힘을 부여한 것이다. 

멀리 바다건너에서는 브라질 뮤지션들의 이러한 선택과는 상관없이 아름다운 보사노바 선율을 연주하고 즐긴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냉전시대로부터 긴 세월이 지난 오늘날, 문화적 아나키즘 아래 성장한 세대들은 이지 리스닝으로서 보사노바를 소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보사노바가 어떻게 등장했으며, 왜 지속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꼭 한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때 그 시절, 보사노바는 쇠퇴한 게 아니라, 중단된 것이며 간직된 것이라고.  그렇기에 보사노바가 지닌 예술적 가치, 순수함, 새로운 음악적 등장의 놀라움은 여전히 유효하고 빛이 바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일 뿐이다. 


8편을 연재하는 시간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남겼다. 

  • 21세기 브라질 국민들은 보사노바를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 21세기 세계 음악씬에서 보사노바와 MPB의 위상은 어떠한가?
  • 예술을 논할 때 정치적 해석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배제해야만 순수한 美에 대한 해석에 가까워지는가? 

그저 나의 궁금증에 불과한 의미없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어쩌면 한국 대중음악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하나의 관점을 제공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생충, BTS, 오징어 게임을 필두로 한국 대중문화가 수출되는 최근의 현상을 두고, 1960년대 브라질 문화의 영미권 수출이 떠오른다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탐구를 이어간다. 즐거운 마음으로!

 

Rio de Janeiro, Ipanema beach, Photo by David Alan Harvey / Magnum Photos / The Guardian

 

Rio de Janeiro, Ipanema beach, Photo by David Alan Harvey / Magnum Photos / The Guardian

 

Rio de Janeiro, Photo by David Alan Harvey / Magnum Photos / The Guar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