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1960년대 브라질 음악사

7. 전세계를 열광시킨 보사노바, 그러나 암울한 독재의 시대로 들어서는 브라질

소심한 늑대개 2021. 12. 4. 10:51

보사노바Bossa nova는 브라질의 경제 부흥의 꿈과 기대가 가득하고 모더니즘이 꽃피우던 1960년대 초,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비니시우스 데 모라이스, 주앙 질베르토로 대표되는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된 서정적이고 세련된 음악이었다. 이는 곧 브라질 전역에서 사랑받는 새로운 음악적 양식이 되었고, 1962년에는 카네기홀 공연을 통해 미국에서도 열광받는 브라질 최고의 수출품이 되었다. 1964년에는 세기의 명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전세계 음악 차트를 휩쓸었다. 애석하게도 이런 꿈과 희망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어지러운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보사노바는 제2물결의 시기를 맞이한다.


세기의 명반 Getz-Gilberto의 탄생, 그리고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1962년 카네기 홀 콘서트를 계기로 미국에서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조빔과 질베르토는 1964년 3월 기념비적인 앨범을 발표한다. 바로 스탄 게츠Stan Getz의 색소폰주앙 질베르토의 기타조빔과 모라이스의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한 'Getz-Gilberto(1964)' 앨범. 음악을 즐겨 듣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앨범이다. 올가 알비즈의 회화작품으로 구성된 앨범 커버 또한 인상 깊다.

그 유명한 Getz-Gilberto (1964), Verve Record


그리고 이 앨범을 통해 소개된 곡이 바로, The Girl from Ipanema였다.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 Garota de Ipanama'라는 곡을 영어로 녹음한 이 곡은 단숨에 1964년 전세계 음악차트를 휩쓸었고 역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된 곡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The girl from Ipanema에는 두 명의 보컬이 등장하는데, 포르투갈어 음절을 부르는 것은 주앙 질베르토, 그리고 영어 버전을 부르는 것은 주앙의 아내 아스트루드Astrud Gilberto였다. 아스투르드는 남편의 미국행에 얼떨결에 보컬을 맡게 된 것이었지만, 꾸밈없고 순수한 그녀의 보컬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그녀 또한 사랑받는 보컬리스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같은 해 7월에는 싱글 Girl from Ipanema가 발매되었는데, 이는 1964년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1~4위는 비틀즈). 기록이 말해주듯, 이 시절 보사노바는 음악산업의 주류무대에서 주연급이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담이지만, 싱글로 발매된 앨범에는 아스투르드가 부른 영어 음절만 남아있는데 - 이는 프로듀서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가 마스터 테이프를 편집하여 포르투갈어 음절만 삭제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주앙 질베르토는 더 이상 자신의 음반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몇 년간 크리드 테일러와 Verve 레코드는 몇년간 미국으로 진출하는 브라질 뮤지션들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주앙 질베르토,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톰 조빔, 월터 반덜리, 마르코스 발레, 탐바 트리오 등이 Verve를 통해 성공적인 앨범들을 발표했다.

보사노바의 제 2 물결 : 시네마 노보(Cinema Novo) 와 함께 저항과 민족주의를 탐구하다


미국이 바다와 태양의 음악에 빠져드는 동안, 브라질에서는 20년 이상 지속될 억압적인 독재 정권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앞선 포스팅에서 설명한 적이 있지만 - 1960년 브라질리아의 시작과 함께 브라질의 부흥기를 약속했던 쿠비체크 대통령은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 했고, 1961년 1월 야니오 쿼드로스가 집권했다. 쿼드로스는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국가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수교를 강화하는 등 독립 외교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변화를 반가워하지 않았던 군부의 사임 압박을 받고 7개월만에 대통령직을 내려놓게 되었고, 이어서 1961년 8월 부통령이었던 주앙 굴라르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굴라르는 중도 우파였던 쿼드로스보다 더욱 좌파적인 성향의 인물이었고, 브라질 군부는 그에게 통치권이 이양되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굴라르가 쿼드로스가 추진한 소련과의 관계 유지 정책을 지속하고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고립시키는 것을 거부하자, 미국 또한 굴라르를 못마땅하기 시작했다. 브라질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 속에서 예술가들은 정치적 행동주의에 대담해지고 있었다. 1960년대 브라질의 시네마 노보 운동을 주도한 감독들*은 신식민주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과 유럽 아방가르드 영화의 고급 예술과 대조되는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영화를 창조함으로써 브라질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 시네마 노보 운동을 주도한 감독 :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Nelson Pereira dos Santos, 글라우베르 호차Glauber Rocha, 루이 게라Ruy Guerra, 카를로스 디게스Carlos Diegues, 호아킴 페드루 드 안드라지Joaquim Pedro de Andrade로 대표된다.

당시 시네마 노보 운동은 정치적·윤리적·사회적으로 민중을 수호하고 뒷골목에 사는 빈곤층과 농촌 사람들의 목소리를 화면에 담는, 독재에 맞선 무기로써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브라질만이 갖고 있는 전통 민담·우화·설화 등 토착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하면서도 상당히 급진적인 표현 방식을 택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부흥했던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영화 형식을 차용하되 그것과는 또 다른 브라질만의 영화 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상파울루 아레나 극장의 아우구스토 보알은 좌파 대중교육운동 차원에서 고안된 연극형식인 'Theatre of the Oppressed' 을 창조하였다. 이 극형식은 전통 연극이 관객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관객 참여형 연극을 강조하는 하나의 장르실험이었다.

이러한 사조는 뮤지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보사노바 제2의 물결을 이룬 음악가들은 시네마 노보 운동과 결을 같이 했다. 모잠비크 태생의 영화감독 루이 게라Ruy Guerra는 브라질 북동부의 풍부한 문화, 음악 세계를 탐구하던 젊은 가수 에두 로보Edu Lobo와 함께 이 지역의 리듬과 이미지를 담은 노래를 작곡했다. 에두 로보는 훗날 아우구스토 보알, 아레나 극장과 함께 'Arena Conta Zumbi*' 쇼의 곡을 쓰기도 했다. 가수 세르지오 리카도Sérgio Ricardo는 글라우버 로차의 영화 'Deus e o Diabo na Terra do Sol(검은신, 하얀 악마)'의 작곡을 맡았다.

에두로보가 아우구스토 보알과 함께 작업한 Arena Canta Zumbi 공연의 모습


* Arena Conta Zumbi : Quilombola(캐리비안 해안 근처나 미국 등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를 일컫는 단어)들의 투쟁과 저항을 그리는 일종의 뮤지컬 쇼. 지배계급이 직원들을 지배하는 방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무대 위에 등장한 8명의 배우가 번갈아 역할을 수행하고 와일드 플레이어가 장면을 연결하면서 하나의 시점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기존의 드라마 구조를 바꿔보자는 의도에서 시도된 형식실험이기도 했다.

 

보사노바의 영원한 뮤즈, 나라 레앙 Nara Leão


나라 레앙 Nara Leão 이라는 뮤지션은 1960년대 중반 보사노바 제2물결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어쩌면 그 변화 자체라고 될 상징적인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보사노바의 시작을 알리는 예전글에서 카를로스 라이라, 로베르토 메네스칼, 나라 레앙 등 젊은 음악가 그룹이 조빔과 모라이스, 질베르토의 음악에 '보사노바'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때 뮤지션들이 모여서 소규모 공연을 즐겼던 클럽이 바로 나라 레앙 부모님의 아파트였다. 그녀는 보사노바 출현의 순간을 함께 했고 그 음악이 뭔가 다르다는 것은 느꼈던 그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레앙은 10대 때부터 기타를 치며 뮤지션들과 어울렸고 아마추어 가수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프로 무대에 데뷔한 것은, 그녀가 21살이 되던 1963년 카를로스 라이라와 모라이스가 리우의 아우본 구르메 클럽에서 초연한 뮤지컬 'Pobre Menina Rica' ('Poor Little Rich Girl')에서 주연을 맡으면서였다. (동명의 앨범이 1964년 발표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성 보컬은 Dulce Nunes가 맡았다.)

브라질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스스로도 정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레앙과 라이라는"브라질만의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전통적인 삼비스타의 음악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초기 보사노바 뮤지션들이 '구식'이라는 이유로 피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레앙은 1963년 말 엘렌코 레코드와 첫 앨범 'NARA'를 발표했는데, 이 앨범에는 카톨라Cartola, 넬슨 카바킨요Nelson Cavaquinho, 제 케티Zé Keti 세 명의 삼바 뮤지션이 참여했다. 나라 레앙, 카를로스 라이라, 세르지오 리카르도, 비니시우스와 바덴 파웰의 아프로-삼바의 작품들은 더 이상 자연과 사랑에 대한 음악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마리우 지 안드라지가 말한 브라질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민족주의적 의제를 가진 음악적 실험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녀는 곧 사랑과 자연을 노래하던 종래의 보사노바와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음악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 얘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Nara Leao의 1집, NARA (1963, Elenco record)

 

또다시 시작된 군부독재, 예술은 어디를 향하는가


The girl from Ipanema가 미국 전역을 휩쓸던 1964년, 다양한 형태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브라질에서는 결국 또 한번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고 기나긴 독재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1964년 3월 주앙 굴라르 대통령은 기본 개혁으로 알려진 많은 급진적 정책의 시행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성인 문맹 퇴치, 다국적 기업의 이익 통제, 의결권 확대, 토지 개혁 등이 포함되었으며, 600헥타르 이상의 부동산을 정부가 수용했다가 재분배하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냉전시대에서 사회주의로 비쳐지며 우익세력과 군부를 자극하게 된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라틴 아메리카에 '반미 정권이 들어설 것'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고 굴라르의 축출을 위해 다양한 수를 썼다. 미국은 브라질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옥죄고 반공 지원에 힘을 쏟으며 마침내 군부 쿠데타를 통해 굴라르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브라질 정치는 군부가 장악하게 되었고, 사회 전반은 눈에 띄게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쿠비체크 시대의 낙관론은 이제 머나먼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브라질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게 되면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자 변모하고 있었다. 브라질 경제 번영에 대한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서정적이고 아름다우며 세련된 '도시적 음악' 보사노바 또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