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1년 8월 16일에 썼던 글을 조금 다듬어서 남겨두는 글이다. 그날은 아마 예술영화 한편을 보려고 집 근처 상영관을 찾다가 포기했던 날인 것 같다. 가까운 곳에 영화 상영관 하나 없다는 사실에 잔뜩 뿔이 났었는지, 지방과 수도권의 문화적 빈부격차에 대한 생각을 마구 쏟아둔 것이다. 당시의 흥분은 가라앉은 지 오래지만, 이 글에 담겨 있는 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곱씹어 본다.
# 지방의 문화 인프라는 서러운 수준
나는 10여년을 수도권에 살다가 2년 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지방도시의 문화 인프라라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서울과의 격차에 정말 놀랐다. 그냥, 갈 데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곳에 살기가 서러울 정도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뭐, 여기는 여기 나름의 문화가 있는데 아직 잘 모르는 거겠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못 찾은 거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찾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상황을 겪고 나서다.
-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을 한 번 봐야겠다. 어? 상영관이 없네
- 서점에 가서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네. 어? 서점이 없구나
- 근처에서 뮤지컬 하는 거 뭐 없나? 아. 그런 거 없구나
- 어디 걸어볼만한 골목길 없나? 음. 체인점들.. 길이 벌써 끝났네
- 라멘이 먹고 싶은데, 지난 번에 갔던 데는 맛이 없었어. 어디 다른 데 없나? 아. 거기 밖에 없구나
여기서 말하는 '없다'의 정의는, 근처에 차 타고 30분 내에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가용을 타고 1시간 정도 걸려서 가야하는 거리라면 집 근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지역의 문화 인프라는 이런 것이다 : 영화, 음식, 음악, 도서, 패션, 인테리어 등 문화의 다양성을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장소
현재 내가 살고있는 이 지역에는 대부분의 문화 인프라가 없거나 어설프게 한 개만 존재하면서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정도이다. 뭐, 위에 언급한 것들이 없다고 해서 당장 삶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긴 하다. 어쩌면 소방서, 종합병원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서 문화 인프라 논하는 게 우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 인프라의 다양성이야말로 21세기 현대인들에게 필수가 아닌가?
그나마 누구나 동의할 필수 인프라라고 볼 수 있는 식문화(음식점)는 또 어떠한가? 지역의 특색있는 식당 중 지속가능한 형태로 유지/발전되고 있는 곳은 드물고 유명한 체인점들만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물론 체인점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인점들이 차지해버린 지방 소도시의 골목길이 - 여전히 다양한 아이디어의 상점들이 존재하는 서울의 골목처럼 활기찬 곳으로 변할 수 있을까?
# 문화 인프라의 핵심은 물리적 거기 있음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이 얼마간 지속되다 보니 모든 형태의 문화적 다양성, 복제품이 아닌 원본, 문화 생산자의 물리적 거기 있음(존재)이 문화 인프라 구축의 필수 요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기본 요소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생산자와 소비자간 "우연성"과 "즉흥성"이 마주치게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문화적 부산물들을 생산하며 더 상위 단계의 문화적 인프라로 진화해나가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문화 인프라를 원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단지 소비와 사용에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로부터 영감을 받고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쏟아내는 생산자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OTT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문화소비를 통해 개인의 영역에서나마 (준)생산자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한 환경을 원한다는 뜻이다. (브런치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 수많은 블로거들과 유투버를 보라!)
# 앞으로, 더더욱, 오프라인 문화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가 곧 문화적 빈부격차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디지털 전환 및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문화 인프라 또한 신기술을 통해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어설픔이 그래서 무섭다. 가상의 공간. 그곳에는 유일성과 우연성은 없고, 복제품과 목적성만 존재한다. 어떤 키워드로, 어디에서 검색해서, 언제 접속해야만,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만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며 오프라인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의 복제된 정보나, 80% 정도로만(혹은 그 이하로) 재현된 제한된 정보를 접하게 된다.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쳐 살갑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한다거나, 나만의 시각으로 여기저기 뜯어보며 새로운 감정과 아이디어를 얻는 경험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공간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생활/경제의 발전이 가속화 되며 모두에게 더 많은 문화적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믿게 될수록, 오프라인 문화 인프라에 쉽게 접근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 사이에는 문화적 빈부격차가 더 심해질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바로 앞의 문장이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문화적 빈부격차라는 표현으로 치환가능하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문화 인프라의 구축이 아닐까
전국의 지방 도시에서는 - 젊은 사람들이 지역에 정착하여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일을 하며 지역 사회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면, 부디 오프라인 문화 인프라 구축에 더 많은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서울이나 중앙정부는 디지털 전환 및 디지털 컨텐츠 사업 개발에 열심이어도 된다. 서울은 이미 컨텐츠가 풍부한 도시인만큼, 디지털 기술을 잘 활용하면 더 좋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앙정부는 국가의 미래 산업으로서 메타버스니 디지털 경제 구축이니 하는 것들을 해야하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소멸을 걱정하는 지방이라면 다른 얘기다. 우연히 마주쳐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오프라인 문화 인프라의 조성이 더 시급하다. 혹시라도, VR안경을 쓰면 서울까지 직접 가지 않더라도 가상세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를 보거나 대림미술관의 전시회를 볼 수 있다며 세상 좋아졌다는 얘기만큼은 하지 말자는 뜻이다. 지자체에서 도서관이나 작은 지역 박물관/전시관을 개방해서 전국의 작가들에게 공간을 꾸밀 기회를 주고 크고 작은 워크샵들도 기획하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줬으면 한다. (중앙정부에서 이러저러 기관들을 옮겨놓고 택지 개발도 하고 철도도 깔아주고 있으니 지자체에서도 뭔가를 해줘야 하지 않는가?) 열악한 문화 인프라 속 지방의 생활수준/만족도가 낮아질수록 기꺼이 지방 도시로 이사오고자 하던 사람들은 더 줄어들 것이고, 수도권 중심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해질 것이다. 수도권 집값이 오르는 건 그저 투기꾼들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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