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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라이프 디자인을 전하는 상점' D&Department(디앤디파트먼트) 철학의 매력

소심한 늑대개 2021. 11. 5. 22:44

이번 제주 여행을 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소는 제주 구도심에 위치한 디앤디파트먼트였다. 여행 마지막 날 들렀던 곳이어서 아쉬운 맘에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나름의 서사가 있었다.

1. 제주에서  마주한, 복제된 양산품의 나열 

제주도에서 처음 이틀간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이런 식이었다. 유명하다는 스시 집을 찾아가 오마카세를 먹고, 유명하다는 요가원을 찾아 일일 수련을 하고, 스페셜티 커피를 마시고, 오설록 뮤지엄에서 프리미엄 티클래스에 참여했으며, 청담동에 본점이 있다는 클래식 바를 방문하고... 여하튼 뭔가 세련되고 좋아보이는 건 다했고 다행스럽게도 나쁘지는 않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득, 제주도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늘 생활하고 있던 도시를 떠나 제주를 찾은 거면서 왜 이렇게까지 '도시스러운' 것을 찾아다니고 있는 걸까, 서울에서도 이렇게까지 소위 '세련된 것'만을 좇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생각은, 실은 불현듯 떠오른 것만은 아니다. 스시를 먹으며 나눈 셰프와의 대화, 바에서 나눈 바텐더와의 대화가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로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해서인지 그들은 '제주의 셰프, 바텐더'이기 보다는 제주에 놀러온 서울 여행객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가져온 양산된 복제품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로만 느껴졌다. 본인이 운영하는 이 곳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서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거나, 본인은 제주에서 일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둥 쓸데없이 도시스러움에 대한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주를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누군가의 음식과 음료를 마시러 간 것이었는데, 어쩌면 제주를 이용하기만 하는 사람의 가게를 방문한 것같아 영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아, 물론 비즈니스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주도라고 해서 촌스러워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말이다, 뭔가가... 그래도....

아마 난 좀 더 일상적이고, 편안하며,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진 제주만의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시 구도심에서 마주한 디앤디파트먼트는 정말 인상깊은 공간이었다. 나는 단번에 디앤디의 철학에 반해버렸고, 반나절 동안 그곳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2. 애정 가득한 공예품을 소개하는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탑동(구도심)에 있는 디앤디파트먼트 2층 모습

서울에서 유입된 것 같은 문화가 불편했다는 긴 서론이 무색하게, 이 곳도 꽤나 세련되고 모던한 공간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그곳을 채우고 있는 컨텐츠의 내용과 그 컨텐츠를 발굴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디앤디는 지역이나 생산지의 중심이 되어 제작자의 의도나 이상을 전하고, 소비자가 그것을 이해하며 물건을 사용하도록 하는 '(공예품을) 전하는 가게'이다.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애정을 가지고, 지역의 개성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이 물건을 소개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 생활인이라는 이유로 싼 물건만 찾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지역과 국가의 상황을 배려하며 기꺼이 좋은 디자인을 (제값에) 구매하고 오랫동안 잘 활용하는 것을 실천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가게라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제주 전통방식으로 빚은 술, 차, 도자기같은 물건들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는 공산품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사용되는 롱라이프 디자인의 물건들, 그리고 버려진 초등학교 비품을 재활용하여 만든 가구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제주이기에 존재할 수 있는 사물 아카이빙이었다.

눈길을 끌었던 정동벌립. 정말 뻣뻣한 나무를 엮어서 어쩜 이리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만들 수 있는지! 30초 정도는 쳐다본 것 같다.

디앤디파트먼트는 오사카에서 시작한, 일종의 무브먼트이자 네트워크 같은 것이다. 창립자 나가오카 겐메이는 디앤디의 철학과 디앤디 지역점을 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으로 아래와 같은 책을 냈다. 현재 한국에는 서울과 제주에 2곳이 있다.

사버리고 말았다. 디앤디의 철학을 소개하는 책


이 책을 번역한 허보윤 교수의 옮긴이의 말이 정말 인상적이어서 일부 기록해둔다. 깊이 공감한다.

... 대량 소비사회로 진입한 후 인류는 삶의 환경을 구성하는 사물들을 오로지 소모품으로만 인식해왔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나 몇 번 입지 않고 그대로 폐기되는 패스트 패션을 대하는 인류의 극단적인 태도는 현대 소비사회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얼마나 왜곡 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물에 인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거나 추억이 담겨 있어 소중하다는 생각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런데 공예는, 의미없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사물에 온기를 불어넣어 사물을 다시 돌아보고 쓰다듬게 만든다. 싸구려 일회용품이 아닌, 누군가가 정성을 다해 만든, 질 좋은 사물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꿔놓는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인생을 대하는 자세도 변한다. ... 내가 생각하는 공예품의 역할을 나가오카 겐메이는 좋은 디자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디자인의 사물을 오래 쓰고 이어 쓰면서 만든 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나의 제주 여행을 돌아보니 내가 어떤 점에서 개운하지 못했는지 얼추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아마 나는 오랜 시간의 고민과 애정이 담긴 물건과 서비스를 경험하고, 그것을 추억하고 간직하고 싶어했던 게 아닐까. 

부디 제주가 육지 사람들의 별장으로서만 기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