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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명필름 아트센터, 이야기의 힘으로 쌓아올린 공간

소심한 늑대개 2022. 2. 19. 15:32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주를 참 좋아한다. 오래전 나를 파주로 처음 이끌었던 헤이리의 예술인 마을은 이젠 알록달록한 간판들이 즐비한 망한 유원지처럼 되어버렸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는 영화와 책, 음악, 건축 등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여느 지역과는 다른 거리의 모습을 조성하고 있다. 자유로를 타고 복잡한 도심속을 벗어나, 어느덧 도로 위의 차들이 줄어들고 저멀리 평화롭고 잔잔하게 햇살을 받아내고 있는 임진강의 모습이 보일 때 - 그쯤되면 나의 마음은 평화로운 동시에 무척이나 들뜬다. 

얼마 전에는 벼르고 벼르던 명필름 아트센터에 다녀왔다. 조용하게 영화를 한 편 보고 싶기도 했지만 목요일이라 상영이 없는 날이었고, 건축물과 내부 전시를 감상하고 오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찬찬히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기에 영화를 볼 수 없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명필름 아트센터 파주사옥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건물은 크게 두 동으로 나누어져 영화 아카데미 및 명필름 사무실이 있는 영화인들을 위한 공간(좌측 건물)과, 영화관, 카페, 전시관 등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우측 건물)로 구성되어있었다.  

이 땅의 가파른 영화환경을 개선 하고자 영화학교를 만들어 그 기능을 담고자 했으며, 외부인들에게도 개방하는 공연과 집회의 다목적 공간과 전시장을 수용하고자 했고 제법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까지 건물에 넣고 싶어 했다. 또한 개인의 주택을 함께 짓는 것은 물론 설립될 영화학교의 학생이나 장기 방문객을 위한 기숙사와 게스트룸까지 포함하고자 했으니, 생산과 소비 그리고 문화와 거주가 있는 이 복합적 기능은 건물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 아니었다. 어떤 작은 도시를 설계해야 하는 일이 본질이었고 그것도 영화라는 상상과 허구(어쩌면 욕망)의 세계를 현실 속에 구축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 글 : 승효상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건축소개) 

명필름 아트센터의 모습

건물은 꽤나 거대했지만 위압감을 준다기보다는 사방으로 연결된 하나의 노드처럼 보였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은 따스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꽤나 추운 겨울날이었고 인적이 드문 거리가 을씨년스러웠던 탓인지, 나는 이 건축물로부터 무언가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다.   주변에는 텅비어있거나 불이 꺼진 사무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코로나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차량 위주로 설계된 불합리한 도로체계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파주출판단지 건축지침에서 임의로 설정한 보행자 위주의 내부적 도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체의 매스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를 이 작은 도시의 주된 광장으로 삼아 어떤 누구도 자유롭게 만나고 헤어지며 머무르게 하였다. 이 광장은 인접해 있는 대지와도 긴밀히 연결되도록 접근로를 만들었으며 휘어지는 도로변에 수목이 있는 공원을 두어 이 작은 도시의 공공영역을 이루게 한다.

두 부분으로 된 매스는 상부의 브리지와 데크로 연결되어 수직적 동선을 통해 이 작은 도시내의 광장과 도로에서 행해지는 행위들을 서로 목격하고 반응할 수 있다. 더구나 광장에 면한 주된 매스의 면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세워 그 속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행위를 외부에 노출시켰으니 풍요로운 삶의 풍경이 일구어 질 것이다.  - 글 : 승효상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건축소개) 

나는 이날 우측동에만 들어가봤을 뿐 이 건축물을 모두 경험하지는 못 했지만, 작은 도시를 설계하려했다는 건축가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하고 온 것 같다. 두 개의 동을 연결하고 있는 브리지, 브리지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들, 창문을 통한 안과 밖의 소통, 뚫려 있는 계단 사이로 이어져있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 

내부는 더욱 도시적이다. 다양한 기능의 공간들이 배치된 속으로 도로 같은 통로들이 관통하며 곳곳에 작은 공원과 휴게의 공간이 있다. 물론 모두가 외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가 서로에게 개방되어 있다. 상부에 있는 주거는 개인적 영역이어서 그 프라이버시가 최대한 보장되도록 하였다. 이 경우에도 가족간에 이루어지는 세계 또한 공동체이어서 그 속에서도 여러 층위를 갖는 공간들이 있다. 그러니 이 건축의 공간이 갖는 층위의 다양함은 대단히 크다. 
 - 글 : 승효상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건축소개) 

층과 층을 연결하는 계단의 모습. 분리되어있지만 - 연결되어있다.


이날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곳은 2층 공연장 앞의 라운지였다. (미드센추리 디자인의) 편안한 소파가 있었던 데다가, 창밖으로 파주의 거리를 바라보며 영화 잡지 아카이빙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의 로비나 공연장의 라운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공간'들을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사람이 없는 시간의 라운지는 텅 비어있고, 고요하며 평안하다. 같은 이유로 공연이 없는 주말 낮 시간, 예술의 전당에 콘서트홀 로비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한 켠에 놓여있는 영화잡지 아카이빙. 이건 내가 진짜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3층에 올라가서 봤던 명필름에서 만든 영화의 포스터/ 포스터 B컷 아카이빙. 몰랐던 영화도 꽤 많았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또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일까?
조용한 가족, 후아유, 접속, 해피엔드 등.

영화관이 있는 지하1층 로비에도 전시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명필름에서 제작한 영화의 포스터를 다시 그린 전시), 상영이 없던 날이라 역시 나 혼자였다.  실컷 구경하고 앉아서 쉬다가는,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영화 접속의 한 모습이 커다랗게 걸린 벽면

이 사진을 찍고는, 언젠가 집에 영화 사진을 커다랗게 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진을 걸어둘지 지금부터 고민 시작이다. 

4층 전시관에서는 마당을 나온 암탉 제작기와 관련한 특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감동과 여운을 전달하는 데에는 망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그 수고로움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영화 자체에 대한 애정을 깊게 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는 곳이었달까. (중단되거나 엎어지는 영화가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개봉하는 모든 영화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영화판에 뛰어든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힘이라는 게 꼭 무슨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이 주는 위안, 기쁨이나 슬픔을 소화하게 만드는 시간, 가끔은 타자이고 싶은 욕구를 달래주는 것 등을 의미한 것이다. 

이 건물은 그렇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공간이다. 

철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소개될 전시를 보러, 그리고 더욱 두터워질 아카이빙을 들춰보려 종종 가게 될 것 같다. 

이 건축은 그래서 늘 변하는 풍경으로 존재한다. 견고하게 땅을 딛고 서 있지만 그 건물은 인프라일 뿐이며 그 견고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도시적 풍경이 수시로 이 건물에 더해지며 바꿀 것이다. 그리고 그 풍경이 적층되어 건물마저 바꾸고 시간을 흘리면 이 작은 도시는 비로서 하나의 건축이 된다. 건축은 건축가가 만드는 게 아니다. 거주자가 이루는 풍경이 건축이라고 믿는다.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제3의 카메라에 담겨서 나오는 영화처럼, 현실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그게 진짜 영화며 진실된 건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건축은 작은 도시이며 스스로 영화이다.  - 글 : 승효상 (명필름 아트센터 홈페이지, 건축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