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변방의 사운드, 라는 책을 통해 1960년 ~ 2000년대 아시안 팝의 변화에 관한 글들을 읽고 있다. 그 중, 한국과 관련된 챕터는 매개체의 변화의 관점에서 한국 대중음악사를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이 흥미로워 정리해본다. NFT가 대중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의견들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뮤직카우'에 불공정거래의 요소가 있다며 음악 저작권료 조각투자에 대한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매체의 발전이 음악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한 이 글을 읽게 된 것은 참 시의적절했던 것 같다.
[요약] 매개체를 통해 본 현대 한국 팝의 역사 : 1960 ~ 2000 / 글: 이기웅
-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음반은 조선 음악 산업의 지배적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은 녹음과 생산을 일본에 의존하는 등 자국의 음반 산업 자체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어지는 한국전쟁은 음반산업을 더욱 궁핍하게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제대로된 녹음실 하나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음반사가 난립하게 되자 정부는 1962년 음반법을 제정하여 음반사 설립 요건을 엄격히 관리한다.
- 한편 리스너들의 상황은 - 빈곤했던 한국의 전후 시기, 집에 전축을 두고 음반을 수집하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고 있다한들 그 통제권은 가부장에게 독점되어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음악을 듣는 양태는 음악감상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세시봉, 디쉐눼 같은 상호가 등장한다.) 이를 통해 '집단적 경험으로서의 음악감상'이 보편화되며 개인의 경험이 아닌 취향의 동질화 및 문화 공동체 형성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음반과 음악감상실이 등장했지만 당시 한국 팝은 공연 중심의 문화로 성장한다. 이는 1930~40년대 공연가들의 주수입원이 유랑극단 공연이었다는 데에서 기인하지만, 1950년대 중반 '미군 부대 쇼'가 음악가들에게 가장 크고 수입이 좋은 무대가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가속화된다. 많은 뮤지션들이 돈을 벌기 위해 미 8군부대 쇼에 섰고, 훗날 이 뮤지션들이 방송에서도 활동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미 8군쇼는 한국 가수들로 하여금 서양의 가수들과 비슷하게 연주고 부를 것만을 요구했다는 데에 있었다. 이 무대는 철저히 커버곡 중심의 공연으로, 음악가들로 하여금 창작을 하거나 자신의 음반을 제작하는 것을 필요치 않게 만들었다. 또는, 음반에는 창작곡을 싣더라도 무대에서는 그 곡을 연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수들은 청중들이 열광하는 외국 가수들의 커버공연 중심으로 무대를 섰다. 미8군쇼는 음악가들이 '창작가'가 아닌 '악사' 중심으로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게 했다.
- 한편 방송은 어떠했는가? 한국에서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7년 경성방송국의 개국이었지만, 국영방송은 진지한 이야기 위주로 진행되다보니 대중음악을 전파에 실어주는 일이 드물었다. 그나마 1960년대 민영방송들이 개국하면서부터 팝 음악이 전파를 타게 되는데, 주로 서양의 팝 음악들이 라디오에서 소개되기 시작한다. 이 때는 음악감상실 디제이에게 팝송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는 등 '도시 지식인층이 선호하는 미국식 스탠더드 팝' 중심으로 방송에서 음악을 틀어주었다.
- 1970년대 초반, 킹레코드와 오리엔트 프로덕션을 필두로 청년문화가 꽃피우고 음반산업도 성장하기 시작한다. 신중현 사단 및 송창식, 이장희와 같은 젊은 포크 계열 아티스트들이 성장했다. 하지만 1975년말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퇴폐풍조 추방 및 사회질서 확립을 명목으로 청년 아티스트들을 잡기 시작한다. 대마초 사건과 공연물 및 가요 정화대책 (1975)으로 청년문화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도 무너지게 된다. 고고 클럽, 음악감상실같이 생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던 곳들도 하나둘 폐업하게 된다.
- 1970년대 후반, TV보급이 보편하되기 시작하며 대중문화는 TV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공교롭게도 유신정권이 대중음악을 탄압한 이후에 일어난 일인데, 이는 검열과 통제 속 '허가받은' 점잖은 컨텐츠만 TV방송을 탈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청년문화에 대한 향수는 대학가요제를 낳게 되었고, TV매체가 팝음악의 스타일과 트렌드를 만들어낸 최초의 사례가 된다.
- 1980년대, 한국은 본격적으로 소비사회에 들어선다. 이제 음반수집 및 사적 영역에서의 음악감상이 유행하게 되었고, 앨범수집이라는 취미도 조금씩 생겨나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앨범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바로 최초의 밀리언셀러) 또 이 시기는 팝음악의 장르 다양화가 본격화된 시대였다. 단순 음악 스타일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와 태도를 내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TV나 밤무대를 주무대로 삼던 뮤지션들 중 일부는 - 자아가 강한 뮤지션 중심으로 - 대안적 공간을 찾아나서게 된다. 소극장 중심의 언더그라운드 공연, 발라드를 부르던 방배동 카페신, 인디음악의 메카 홍대 등.. 이러한 음악의 분화 및 소비형태의 변화에도 음반 산업 자체가 굳건해지지는 못하였고, 뒤이어 나타난 디지털 혁명으로 음반 판매고는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 1980년대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방송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19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TV가 라디오가 KBS와 MBC에 의해 독점당하면서 가수들의 "TV출연을 통한 출세" 공식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러한 변화는 TV의 기준이 곧 가수로서 성공하는 데에 필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준은 바로 1) 만능 엔터테이너여야 하며 2) 특정한 외양의 기준을 만족해야했으며 3) 모든 세대에 고르게 어필해야한다 는 점이었다. 이 때 인기를 얻었던 가수들이 조용필, 김완선, 박남정 등이 있다.
- 1990년대, 한국 팝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서태지의 등장을 필두로 민주화 이후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허용된 덕분이다. 또한 경제성장으로 소비주의가 강화되고 미디어환경도 다양화된 덕분이다 (1995년 케이블 방송이 출범한다.) 90년대는 음반과 공연산업 전체가 성장하면서 음악가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열린 시기였다.주류 음악에 대한 TV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수들의 립싱크나 순위 프로그램의 불공정성 등 이런저런 도전을 받기도 했다.
글을 읽고
2000년대 이후 음악시장은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2020년대 현재는 영상매체마저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되며 '물리적 음반'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 레트로 열풍과 함께 음반 시장은 다시금 반짝 호황기를 맞는 것도 같다. 다양성이 존재하던 1950~1990 음악시장에 대한 2030의 호기심으로 인해, 방대한 음악경험을 나누어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 제공자로서 DJ의 역할이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 희소가치가 있는 LP를 힙한 취미나 재테크 수단으로 생각하고 음반수집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NFT와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음악산업의 판도를 바꿔놓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한 의견은 아직 분분한 것 같다. 이 상황을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티스트가 팬들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늘어나고 팬의 입장에서는 작품에 대한 고유의 권한을 얻게 되니 윈윈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거대 기획사에 대한 아티스트들의 의존도가 낮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 순진한 생각인 것 같다. 사실상 취향이 없는 대중들은 자금의 흐름이나 만들어진 대세에 호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매체가 음악을 소개하는 방식이나 매체가 타겟으로 설정하는 대중의 성격이 결국 "대중음악의 성격"을 결정한다. 지난 몇십년간의 흐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상황은 어떠하고 이를 결정지은 요인은 무엇인지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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