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음악/Artist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의 삶과 음악 1

소심한 늑대개 2023. 6. 25. 23:44

[Getz/Gilberto]의 그 목소리,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간주가 시작되면 1초만에 알아챌 수 있는 그 노래, The Girl from Ipanema의 주인공,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 언제 들어도 꿈꾸는 듯 몽환적이고 사랑스러우며 꾸밈없이 순수한 목소리의 그녀가 얼마 전 작고했다. 그러고보니 2002년에 낸 마지막 앨범을 끝으로 무려 21년동안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았던 아스트루드였다. 문득 그녀의 삶과 음악 여정이 궁금해졌고, [Getz/Gilberto]의 영광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떤 음악인생을 살았는지 남겨보고자 한다.  

1972년의 Astrud Gilberto (출처: IMDB)

아스트루드가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유명하다. 1963년, 당시 남편이자 보사노바의 창시자인 주앙 질베르토João Gilberto와 스탄 게츠Stan Getz의 작업을 위해 미국으로 함께 가게 되었는데, 여성 보컬이 한 명 필요했고 마침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아스트루드에게 노래를 시켜보니 ‘의외로 너무 잘해서’ 앨범에 목소리가 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스트루드가 기억하는 사실은 이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그녀는 스탄 게츠와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 [Getz/Gilberto] 앨범 제작자)가 자신들의 안목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마치 ‘본인들이 그녀를 발견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다며 불만을 밝힌 바 있다. 
[Getz/Gilberto]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을 당시의 아스트루드는, 아직 진지하지는 않지만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꿈을 가진 아마츄어 가수였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겼고 리우의 소규모 클럽(동아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보컬리스트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0대 중반부터 나라 레앙Nara Leão, 로베르토 메네스칼Roberto Menescal과 같은 뮤지션들과 어울렸고, 주앙 질베르토를 처음 만난 곳도 나라 레앙의 아파트에서 열린 음악 모임이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그녀는 늘 주앙 질베르토와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스트루드가 2002년 친구들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녀는 [Getz/Gilberto] 앨범에 참여하게 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Getz/Gilberto] 녹음 리허설에 가기 몇 시간 전, 주앙은 아스트루드에게 “오늘 당신에게 줄 깜짝 선물이 있어”라고 말했다. 무엇이냐고 물어봐도 “기다려봐....”라고 말하던 주앙은, 리허설에서 ‘The Girl from Ipanema’를 부르던 중 아스트루드에게 합류해서 노래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포르투갈어로 된 부분을 부르고 난 뒤 영어로 된 부분에서 합류해 합창해달라고 말이다. 아스투르드는 늘 하던 대로 자연스레 함께 노래했고, 주앙은 스탄 게츠에게 “내일 녹음할 때 그녀를 참여시키는 게 어때요?”라고 물었다. 스탄 게츠는 단번에 승낙했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노래로 유명해질 거에요.”
우리가 아스트루드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실은 아내의 목소리를 인정한 주앙 질베르토 덕분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이 일화는 스탄 게츠가 가정주부에 불과했던 아스트루드를 단박에 스타덤에 오르게 해주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알려져 왔다. 스탄 게츠가 우쭐대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거나, 버브 레코드에서 활용했던 홍보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1960년대 브라질 음악사를 포스팅하면서 아스트루드가 ‘얼떨결’에 노래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오류였음을 인정해야겠다.

 

주앙, 아스트루드와 그들의 아들 마르셀로. 1960년 1월 'Ultima Hora'와의 인터뷰에 실린 사진(출처: http://brazil-1970s.blogspot.com/2014/06/astrud-joao-gilberto.html)

 

혜성 같은 등장, 그렇지만 잘못 끼워진 첫 단추

1964년 3월, [Getz/Gilberto] 앨범은 발표 직후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아스트루드의 섬세하고 수줍은 보컬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윽고 그녀 목소리의 잠재력을 알아챈 버브 레코드는 1964년 5월, 주앙 질베르토의 목소리는 지우고 아스트루드가 부른 부분만을 편집한 ‘The Girl from Ipanema’ 싱글을 발매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Getz/Gilberto] 앨범은 96주간 빌보드 차트에 머물며, 1965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수상했다.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재즈 부문이 수상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이 기록은 43년이 지난 2008년에야 허비 행콕의 [River: The Joni Letters]가 상을 받으며 재현된다. 아스트루드의 싱글 The Girl from Ipanema는 빌보트 차트 5위까지 올랐고, 1965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곡을 수상한다.

[The Girl from Ipanema, Verve/1964] 아스트루드의 싱글 앨범

Ruy Castro의 2003년 저서에 따르면 주앙 질베르토는 [Getz/Gilberto] 작업으로 23,000달러를, 스탄 게츠는 백만 달러를 벌었다. 그런데 이 앨범의 히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아스트루드에게 돌아간 로열티는 한 푼도 없었다고 한다. 이건 재즈 동료들과 여성을 거칠게 대했던 스탄 게츠의 악행 때문이었는데, The Girl from Ipanema가 히트 칠 조짐이 보이자 스탄 게츠가 크리드 테일러에게 전화를 걸어 아스트루드에게 수익이 배분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녀를 ‘자신이 선심을 써서 앨범에 참여하게 해준 무료 백보컬’ 정도로 생각했었나 보다. 아스트루드는 앨범의 세계적인 히트의 주인공이었음에도 그녀의 역할은 금전적으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 했다.
그런 와중, 1964년 어느날 아스트루드를 싱어로서 홀로 서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주앙이 스탄 게츠의 Cafe Au Go Go(뉴욕의 재즈클럽) 무대에 함께 서기로 한 날, 그의 손에 쥐가 나는 등 건강상 문제가 생겨 대신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죽을 만큼 떨렸지만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공연을 보기 위해서 클럽 밖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대 위에서 노래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Stan Getz/Astrud Gilberto [GETZ AU GOGO/1964, Verve]

한편 1963년부터 아스트루드와 주앙의 결혼생활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Getz/Gilberto] 앨범 녹음을 마친 뒤에 있었던 1963년 유럽 투어 중, 주앙이 미우샤Miúcha(그녀 또한 보사노바 가수이다)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Getz/Gilberto] 앨범이 발표된 후 두 사람은 이혼했다. 언론에서는 아스트루드가 스탄 게츠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주앙이 그녀를 떠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965년, 주앙은 미우샤와 결혼했다. 한국에 종종 방문했던 Bebel Gilberto는 주앙 질베르토와 미우샤 사이의 딸이다.

스탄 게츠는 아스트루드의 Cafe Au GO GO 무대가 끝난 뒤, 워싱턴의 카터 배런 극장에서 열린 2주간의 무대에 그녀를 초청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아스트루드는 본인의 본격적인 가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서명한 첫 번째 계약은 게츠의 밴드에서 6개월간 게스트 보컬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아스트루드는 당시 계약 조건이 매우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앙과 헤어져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그 일을 해야만 했다고 고백했다. 공연의 주인공이었던 아스트루드에게 스탄 게츠가 지급한 세션비는 고작 일당 120달러에 불과했다. 노예계약으로 시작한 경력은 신인 시절 그녀가 지속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받는 계기가 되었다.

스탄 게츠(왼쪽)과 아스트루드 질베르토(가운데), 영화 "Get Yourself A College Girl(1964)“의 한 장면

이 무렵 아스트루드는 정말 쉽지 않은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사랑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음악적 동료로서 대우는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고, 이혼의 아픔도 이겨내야 했으며, 심지어 고향 브라질에서는 그녀의 성공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예술가들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1960년대 중반, 일부 브라질의 음악가들은 아스트루드가 운이 좋아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빈정거렸고 언론에서는 마치 그녀를 ‘고국을 등진 사람’인 것처럼 비판했다. (보사노바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나 세르지오 멘데스가 미국에서 거둔 성공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급기야 아스트루드가 1965년 상파울루 콘서트에서 관객의 야유를 받았다는 거짓 기사가 보도되었고, 그녀는 무척 상처를 받아 그 이후로 브라질에서는 한 번도 공연을 하지 않았다.
신인 시절 스탄 게츠와 함께 작업하게 된 것은 좋은 기회였지만 많은 상처도 남긴 시절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적절한 페이를 지불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는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였기 때문이다. (스탄 게츠가 유명함 바람둥이였고 당시 아내를 폭행하기도 했다.) 그녀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탄 게츠와의 투어가 ‘고통스러웠다’고 표현하자, 게츠가 내놓은 변명은 ‘나는 그녀가 늘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게끔 관리해주었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아스트루드는 투어 내내 스탄 게츠와 사귀었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또, 이런 리뷰가 실렸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가 어떤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는지 알게 된다 : 비키니를 입은 이국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 수많은 남성들의 공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일종의 섹스 심벌이었다. 아스트루드의 아들 마르셀로Marcelo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고 ‘아스트루드’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환상을 깨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Getz/Gilberto] 앨범의 성공 이면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그리고 아스트루드가 어떤 대우를 받았었는지는 알고 나면, 스탄 게츠 옆에서 노래하는 아스트루드의 얼굴이 더이상 행복한 얼굴로 보이지는 않는다. 1960년대는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쉽지 않은 시기였고 (유리천장이라는 단어가 1970년대 후반에야 나왔음을 생각해보라!),  아스트루드는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싱글맘이었다. 이런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 너무 길어져서 2편(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의 삶과 음악 2)에서 계속)